가자! 인증샷 하러...태평2년명 마애약사불 좌상/선법사
97.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 좌상
선법사에서 천년 약사불을 만나다
하남시 교산동 산10-3...031-792-2654
선법사 내 산입구
습기가 가득한 흐린날 찾아나선 곳
예전 즐겨찾던 라이딩코스 선법사.
약수터 옆 폭포수는 시원하게 떨어지고...
물길 건너편에 세워진 포토존에 다가서느라 오늘도 혼자 쌩쑈~한다.
셀카 찰칵! ^&^*
불교미술 ***
하남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좌상
기본적인 도상 충실…정교한 표현 작지만 빼어난 고려시대 마애불
복련좌 하대, 앙련좌 상대…화려한 대좌 특징
‘융기된 선묘’로 옷 주름이나 장식 표현 이채
산신과 용왕이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는 형국
사진설명: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
태평이년명(太平二年銘) 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은 현재 하남시 교산동 소재 선법사 경내에 있다. 고려시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이 마애불은 크기도 작고, 소규모 절의 한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당대의 여느 마애불과 비교해 볼 때 조각 수법이 단연 뛰어나고, 도상적으로도 완벽하며, 더구나 조성 연대를 유추할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불교미술사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폭포가 흘러내리고 맑은 약수가 솟는 산록의 바위에 새겨진 이 마애불은 우리 전통의 무교와 습합된 고려불교의 신앙형태를 조감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문화유적이기도 하다.
하남 선법사는 2004년 12월, 정부에 의해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전통사찰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경내에 이 마애불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법사 마애약사불이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된 것은 1979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고서부터이다.
당시에는 이 불상이 행정구역상 광주군에 속해 있었고, 지역, 재질, 기법, 내용, 형태 등을 기준으로 하는 문화재지정명칭 작성 지침에 따라 ‘광주 교산리 마애약사여래좌상’으로 명명되었다. 10년 후인 1989년에는 다시 보물급 문화재로 승격되면서 지정 명칭이 ‘태평이년명마애약사불좌상’으로 변경되었는데, 이것은 마애불 오른 쪽 면에 새겨진 명문 내용을 근거로 해서 작명한 결과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마애불의 수는 총 2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상 종류에는 돌을 바위에서 따로 떼어내어 조각한 석불상이나 금속을 재료로 한 금동불, 철불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류의 불상들 중에는 원래 있던 자리를 떠나 있는 것도 많고, 파손되어 원형을 잃었거나 아예 없어진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약탈자의 손에 의해 해외로 반출되어 불상 조성 목적이나 원래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된 사례도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천연의 바위나 암벽에 새긴 마애불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후부터 지금까지 조성된 그 수만큼, 그 자리에, 그 모양 그대로 남아 있는 불교 유적이라는 점에서 높은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선법사 마애불 역시 그런 의미를 가진 마애불 가운데 하나이다.
현존 마애불 중에서 70% 이상이 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중에는 10미터가 넘는 규모가 큰 마애불도 적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주 용미리 마애불(조선시대 불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안동 이천동 마애불 등이 거불(巨佛)에 속하는 고려시대 불상이다. 이런 거불들도 예외가 아니지만 대부분 고려시대 마애불은 얼굴 부분은 비교적 정성스럽게 다듬어져 있지만 얼굴 외의 신체 부위나 옷은 형식적으로 처리되거나 생략된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선법사의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은 규모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대좌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여래상의 기본적인 도상을 충실히 갖추고 있으며, 각 부분의 표현도 매우 정교하여 고려시대 마애불 중에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법사 마애약사불은 왼손으로 약합을 들고 오른 손으로 무외인(無畏印)을 결한 채 사각 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식이며, 두광과 신광을 겸비하고 있다. 두광은 백호를 중심으로 하는 3개의 동심원으로, 신광은 가슴을 중심으로 하는 세 개의 동심원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려 중기 이후의 마애불에는 대좌가 생략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있다고 해도 소략한 앙련좌 정도가 묘사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선법사 마애불은 단판 복련좌의 하대, 복련 앙련좌의 상대를 갖춘 화려하고 장식성이 풍부한 대좌를 가지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고려시대 불상의 양식은 크게 세 가지 양식으로 분류된다. 그 하나는 중국식 불상 양식을 수용한 것, 그리고 전대(前代)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한 것, 마지막으로 고려인들이 독자적으로 창안해 낸 불상양식이다.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한 불상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마애불에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유행했던 우견편단식의 법의 표현, 원만한 상호, 안정된 자세, 조화로운 비례 등 전대의 양식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시대 마애불의 조각 기법은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몸 전체를 바위 면에 입체적으로 부조한 것, 얼굴만 부조기법으로 조각하고 몸은 음각선으로 표현한 것, 큰 바위를 몸으로 삼고 환조의 두상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 그리고 전체를 음각선만으로 묘사한 것 등이 있다. 그런데 선법사 마애불은 음각선으로 옷 주름이나 장식 문양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조각 기법과 달리 융기된 선묘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어 이채롭다.
마애불 오른쪽에 세련된 필치는 아니지만 중요한 내용을 담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글자는 “太平二年 丁丑 七月卄九日 古石佛在如賜工重脩 爲今上皇帝萬歲願”으로 판독되고 있는데, “태평 2년 정축 7월 29일, 옛 석불이 있어 공장(工匠)에게 주어 지금의 상황제의 만수무강을 발원한다’는 내용으로 풀이된다. 이 내용을 근거로 할 때 이 명문이 고려 경종 2년 즉, 서기 977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석불(古石佛)’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마애불이 명문을 새기기 이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설명: 바위 표면에 새겨진 명문.
명문의 “爲今上皇帝萬歲願”이라는 내용만 보면 이 불상이 당초에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래상의 실제의 모습은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성된 불상이라고 보기엔 그 규모가 너무 작고 민예적(民藝的)인 색채가 강하다. 또한 명문의 “重脩”라고 한 내용을 주목해 본다면 명문을 쓴 시점과 불상이 조성된 시기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여래상은 당초에 황제의 만수무강을 축원할 목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가족의 풍요와 다산, 지역 공동체의 평안과 수호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한 불상을 황제를 기리는 원불(願佛)로 재탄생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사진설명: 약사여래 수인. 왼쪽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약합이다.
선법사 마애약사불은 세모난 바위 윗부분에 새겨져 있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 바로 옆에는 이보다 조금 더 큰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왼쪽으로 수량이 제법 많은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고, 폭포 옆 바위 밑에서는 약수가 솟아나고 있다. 이 샘은 용왕당, 혹은 용신당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용신신앙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불상이 새겨진 바위의 오른 쪽에는 흰 글씨로 ‘나무산왕대신(南無山王大神)’이라고 쓴 작은 바위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산신당(山神堂), 또는 산신의 신체(神體)를 상징하는 것으로, 산신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이 일대의 공간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보면 산신과 용왕이 약사여래를 협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산신신앙은 우리민족의 토속 신앙의 중요한 한 줄기로, 그것은 높은 산이나 깊고 그윽한 계곡의 신비감이 도는 곳에 산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관념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신의 모습은 의인화된 선풍도골 풍채(風采)의 노인상으로 관념되고 있다. 산신은 보통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표현된 인물상으로 나타나지만 선법사에서 보듯이 돌에 산신의 명호를 쓴 위폐 모양의 돌로써 산신의 신체(神體)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용신신앙은 용신을 숭배하는 신앙으로, 그 제의는 용왕당, 용신당 등에서 이루어진다. 속신에 의하면 용신에게 빌면 용신이 우물을 통해 용궁을 왕래하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 그리고 위험한 액을 막고 복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선법사 바위에 새겨진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고 재화(災禍)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 하는 등 12대원을 세운 부처님으로, 서민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현실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부처님이다. 그리고 바위 자체는 선사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무속 신앙의 한 갈래인 바위신앙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다.
선법사의 바위는 그곳에 약사불이 새겨짐으로써 더욱 신격화된 신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민들은 그렇게 신격화된 바위에 경배하면서 개인이나 가족의 평안과 생활의 풍요를 빌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위 자체가 가지는 주술적인 힘과 약사여래가 가지고 있는 중생 구제의 위신력이 함께 작용하면 효과가 배가되어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출처;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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